인간의 조건 – 신화와 현실 사이
인간은 유한함이라는 조건 속에 태어난다. 그 한계 속에서 말과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관계를 맺고, 갈등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선과 악, 강함과 연약함, 주체와 객체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늘 ‘경계 위’에 머무른다.
서민정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경계의 상태, 그리고 인간이 품고 있는 양가적 감정을 시각화한다.
그녀가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거인’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존재이다. 특징 없이 커다란 몸을 가진 이 형상은 누구나 될 수 있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신화가 된 일상의 파편
우리는 삶에서 마주하는 고통과 죄책, 우울과 죽음을 이성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신화를 만들어왔다.
서민정의 작업은 이 신화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불러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레몬을 받아 춤을 추는 거인. 불타는 집을 뒤로 한 채 멈추지 않는 그 몸짓은 재난과 시련 앞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내적 리듬을 보여준다.
또 다른 장면에서 거인은 나무를 심지만, 하늘 위에선 낫을 든 새가 그 나무를 베려 한다. 인간이 애써 가꾼 모든 것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거인은 멈추지 않는다. 모른 채이든, 알고서든 다시 심는다.
이 반복은 허무이자 동시에 희망이다.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운명.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거인, 그리고 우리
서민정의 ‘거인’은 우리 내면의 가장 원초적인 상태를 닮았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가능성과 잠재력, 그리고 경계에 서 있는 불안정한 존재. 비어 있는 동시에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 형상은 결국 인간다움의 근원을 응시하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그녀의 작품은 거대한 선언이나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질문한다.
“결국 사라질지라도, 당신은 오늘 무엇을 심을 것인가?”
신화와 현실의 접점에서
이번 전시는 거인을 따라 걸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장면들을 신화처럼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복잡함 앞에서 꺼내 드는 또 다른 형태의 진실이다.
재난과 무력함 속에서도, 작은 친절과 연민에 기대어 또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 이 전시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포기되지 않은 감각들을 위한 응시이다.